2008.02.18 00:04
 



담양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아마도 두 가지 목적쯤은 안고 갈 듯하다. 그 하나는 정자고 그 나머지 하나는 대나무가 차지할 터인데, 실제로 담양에서 받은 느낌은, 대나무는 시쳇말로 사양산업이 되어 있고, 정자는 이제 갓 피어나는 문화산업쯤으로 대접받고 있는 형국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우리나라 정자의 수는 팔백여 개에 이른다. 그런데 유독 담양의 정자에만 답사객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 까닭은 뭘까?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이 이상하게도 거의 한결같다. 그 대답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한결같이 책 한 권이 거론되는 것이다. 유 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아직도 이 책은 여전히 답사여행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 책 때문에 우리의 문화유산 답사가 한정되고, "아는 만큼 본다"는 지은이의 주장도 무색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1755년 목각판_소쇄원도

 

여행객들에게 각광받는 소쇄원
담양의 누정문화를 살피는 여행이니만큼 담양읍에서 여행을 시작해야 하지만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소쇄원부터 시작해서 담양읍으로 들어오는 것도 재미있다. 유명한 정자들은 담양읍에서 남쪽에 있는데, 담양읍에서 시작해 광주를 살짝 걸쳐 화순을 잇는 팔백팔십칠 번 지방도와 이십구 번 국도 근처에 그 유명한 정자들이 모여 있다. 두 길은 어떨 때는 만나고, 어떨 때는 헤어져 담양을 지나가는데, 이 길만 하나 섭렵하면 담양의 유명한 정자들은 다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쇄원도 팔백팔십칠 번 지방도 바로 옆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인터체인지에서 광주로 진입하면 광주교도소 방향으로 팔백팔십칠 번 지방도로를 타고 간다. 그러면 먼저 식영정을 볼 수 있고, 조금 더 가서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왼쪽 길을 잡아 일 분에서 이 분 정도 가면 소쇄원 주차장이 보인다.

 




소쇄원

소쇄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그래서 조경, 한문학, 사학, 음악, 철학, 건축학 같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곳을 견학하러 오는 학생 또한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소쇄원도 많이 훼손됐다. 소쇄원뿐만 아니라 소쇄원을 지키고 있는 양 상보의 자손들도 이 소쇄원 때문에 지쳐 있다. 어느 고택이나 마찬가지로 소쇄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양 상보 십오 대 장손도 젊은 세월을 다 소쇄원에 바치고 살았다. 마흔 살 양 재영 씨의 눈에 비친 소쇄윈은 이제 늙고 병든 정원이다.

 

"많이 훼손됐어요.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 전에는 원형이 잘 보전됐다고 칭찬을 받은 곳인데, 이제는 사람들의 손을 너무 탔어요. 일년이면 백만 명이 넘게 와요. 하루에 천 명이 다녀가는 경우도 있어요."

요즈음 그이가 받은 협조전, 공문만 해도 파일북 두 개를 두껍게 만들 정도다. 천구백팔십삼년 문화재 지정을 받고 천구백팔십팔년 올림픽이 열린 뒤로 교통이 좋아지면서 부쩍 관람객들이 느는데, 그이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김 지하 시인 참 많이 닳았어요?" "하하하…내 별명이 김지하예요. 그 양반은 감옥에 갇혀서 얼굴이 폭 삭았고, 나는 소쇄원에 갇혀서 얼굴이 폭 삭았지요. 학교 다닐 때는 물론 타지에 나가 있었지만, 제사며, 집안 대소사 때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여기로 달려왔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줄곧 여기를 떠나 본 적이 없어요. 젊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장손으로서 문중 어른들의 말씀도 엄하시고…"

그이는 밤에도 잠을 못 잔다. 술 마시러 오는 사람에, 음탕한 짓을 하러 오는 사람, 자식을 버리러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낮이라면 감히 상상을 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싸움도 많이 한다고. 그럼에도 이곳에 그 흔한 입장매표소도 없고, 담장도 없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소쇄원뿐 아니라 담양의 모든 정자에 입장료가 없다는 점이다.

"입장료를 보호수단이 아니라 영리수단으로 받는 곳이 많아요.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받지 않습니다. 담양을 찾는 관광객들 거의 대부분 소쇄원을 보러 오는 거지요. 이곳에서 입장료를 받으면 지역경제에도 타격이 있을 거예요. 이것도 입장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죠.".

양씨의 설명에 따르면 소쇄원 근처 요식업체는 불황을 몰라 담양군에서도 이 지역이 세금을 제일 많이 낸다고 한다. 하지만 소쇄원 근처의 농민들은 소쇄원 때문에 재산권을 맘대로 행사할 수 없어서 소쇄원이 원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광주 관광 안내 팸플릿에도 그저 간단한 설명만 실려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정원 문화의 최고봉인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 산보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광풍각, 제월당, 오곡문, 애양단 등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경치가 빼어난 곳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학자들과 조경전문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경치가 어떤 면에서 빼어난지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설명서를 읽고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소쇄원을 산책 코스로만 여기는 듯하다. 보통 대봉대, 애양단, 오곡문, 매단, 제월당, 광풍각으로 한바퀴 돌아서 빠져나간다. 물론 자기네들끼리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말이다. 다 돌았으면 자연스럽게 차를 타기 위해서 삼삼오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소쇄원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어떤 이의 글은 소쇄원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각을 보여 주고 있어서 뜨끔하게 들린다.

"사람들이 소쇄원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담배 한두 대 피우는 시간 정도나 될까? 그리고 반응은 대체적으로 '별거 아니네'다. 소쇄원이 대단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명하다니까 찾아온 사람들이다. 크고 으리으리해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눈에 소쇄원은 결코 대단한 무엇이 없다. 조그마한 기와집 두 채와 볏집으로 이은 정자 하나가 천사백오십 평 넓이에 벌리고 앉았을 뿐이다. 소쇄원, 소쇄원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왜 소쇄원 소쇄원 그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규모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건축사적 가치가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소중하다니까 소중한 줄 안다."

 

소쇄원의 아름다움도 밖에서 봐서 깨달을 것이 못 된다. 이곳의 주인이 앉아 있었던 곳, 이곳의 주인이 거닐었던 길에서 풍경을 바라봐야 제 멋이 나온다. 어떤 이는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가진 제월당에 앉아서 소소히 내리비치는 달빛을 바라볼 때 소쇄원의 참 멋을 느낄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광풍각에서 벙그는 봄꽃을 바라볼 때 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공통점은 정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자에서 세상을 관람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소쇄원을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소쇄원의 주인 양 재영 씨는 소쇄원이 왜 중요한지, 왜 아름다운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이와 커피를 나누면서 듣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은 각별하다. 우선 "소쇄"라는 이름부터 재미있다. 그이의 설명에 의하면 "소쇄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속세를 떠났다거나, 처량하다는 뜻"도 있다.

 

"십육 세기 후반 소쇄원이 생길 때는 전라도에 서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림은 학문적인 요소가 강했지요."

 

소쇄원을 시발로 담양에 정자가 많은 까닭을 알 법한 대목이고, 전라도 지역의 유배문화나, 처사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이는 또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축대에서 찾는다.

"건물도 그렇지만 축대야말로 소쇄원의 미학을 가득 담고 있지요. 오곡문 곁의 담 아래 뚫린 계곡물 유입구는 가히 절경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 급류가 생겨도 그 담장이 무너진 적은 없었어요. 보기엔 얼기설기 돌을 그냥 올려놓은 것 같은데, 과학적으로 급류를 잘 견디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에요. 담은 기의 개념으로 보면 더욱 재미있어요. 즉 흐름에 따라 담이 만들어졌으니 오늘날에도 그런 동선이 생기지요."

 

       한 걸음 한 걸음 물결을 보고 걷자니
       한 걸음에 시 한 수 생각은 깊어지는데
       흐르는 물의 근원은 알 수 없으니
       물끄러미 담장 밑 계류만 바라보네.

 

하서 김 인후가 지은 <소쇄원사십팔영가> 가운데 "담장을 뚫고 흐르는 계곡물" 이라는 시다. 이 시 또한 소쇄원의 담장과 축대를 이야기한 것이니 만큼 예로부터 소쇄원의 담장이 갖는 매력은 대단했던 듯하다.

 

송강정의 붉은 소나무

앞에서도 말했듯이 식영정은 소쇄원에서 그리 멀지 않다. 남면 지곡리의 식영정은 <성산별곡>이 만들어진 곳이다. 식영정은 명종 십오 년인 천오백육십년 서하당 김 성원이 창건하여 장인인 석천 임 억령에게 증여했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딴 서하당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얼마 전 복원하였다. 서하당 김 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나이가 십일 년이나 위였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 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 같은 성산 일대의 화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 <성산별곡>을 창작해 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 순, 하서 김 인후. 고봉 기 대승 들 하여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 경명, 옥봉 백 광훈, 귀봉 송 익필 들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곳은 식영정 밖에도 풍광이 수려했다. 자미탄, 노자암, 방초주, 조대, 부용당, 서석대 들이 있었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일부는 물에 잠기고 부용당만이 얼마 전 새로 지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 일번지에 있는 송강정은 식영정과 함께 전라남도 기념물 제일 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효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이 처음에는 창계천이라 불리다가, 광주댐 근교의 관수정과 동강조대 쪽에서는 증암강이라고 불리는데, 이곳 송강정 앞에서는 죽록천이라 한다. 그런 탓에 정자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다. 천오백팔십사년 송강 정 철은 당쟁으로 정계에서 쫓겨나 이곳에 머물면서 정자의 이름을 송강정이라 했다. 그래서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액이, 오른쪽에는 죽록정이라는 현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정자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은 다 그리 크지 않은데, 본래는 사람들이 지나다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한 건물 가운데 한 층으로 구성된 작은 건물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송강정도 자연을 감상하기 위한 건물인 셈이다. 송강정에서 바라보는 죽록천의 운치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죽록천의 수량이 많지 않아 옛날 같은 운치는 없다고 한다.

담양에서 소소선방이라는 찻집을 운영하는 김 가혜 씨는 송강정의 아름다움을 송강정 옆에 있는 적송군락에서 찾는다. 김 가혜 씨는 찻집을 운영하면서도 담양의 누정문화에 심취해 이제는 누정문화 답사 안내자를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다.

"지금이야 남아 있을 풍광이 뭐 대단하겠어요. 하지만 옛 선인들의 자취를 음미하면서 솔숲을 거닐어 보면 조금은 남다른 감회를 느낄 거예요. 그리고 송강정에서 보면 무등산이 보이는데, 인왕봉, 제왕봉, 천왕봉이 마치 뫼 산 자처럼 보여요. 이것도 재미있지요. 누정을 볼 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면 되는 거예요."

 

담양읍에서 가장 가까운 정자가 면앙정이다. 이십구 번 도로에서 다시 담양으로 가는 팔백팔십칠 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봉산초등학교로 들어가는 푯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동산 하나를 만나는 데 면앙정은 그 동산의 눈썹에 있어서 면앙정에 오르면 그 아래 너른 들판이며 들판 건너편 삼인산과 병풍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김 가혜 씨는 면앙정이라는 이름이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뜻을 가졌다면서 "구름을 타고 청학이 날아가는 듯한 지붕의 형태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이가 더욱 강조하는 정자의 아름다움은 역시 안에서 밖을 보라는 것.

"정자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면앙정만 봐도 이 말이 옳다. 아니 담양에 있는 모든 정자들을 봐도 이 말은 확실히 옳다. 그이의 설명을 좀 세세하게 늘어놓아 보자.

"정자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정자의 끝에 앉아 보면 그 뜻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누정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 누정에서 그 앞의 경치를 볼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면앙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죠."

 

면앙정 옆에 있는 입간판 설명에 따르면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는 단순한 소개로 그칠 정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자 끝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면 그 설명이 정말 하잘것없고, 오히려 치졸하게 느껴진다. 김 가혜 씨의 설명을 들으면 입간판을 보고는 "저렇게밖에 설명을 못하나" 하면서 혀를 끌끌 차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면앙정 앞 넓은 들에 물이 흘러서 배를 띄워 노를 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넓은 들을 이루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삼인산과 그 옆으로 병풍산이 있어 저녁 해가 질 때면 삼인산 쪽으로 기우는 노을 빛이 사뭇 환상적이라고 김 가혜 씨는 전한다.

면앙정이 있는 봉산은 송 순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송 순은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퇴계 이 황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문인들이 신평선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면앙정 송 순 문하에 제봉 고 경명, 고봉 기 대승, 백호 임 제 들이 공부를 했으며 특히 송강 정 철 또한 그이에게서 사사했다고 전한다. 가사인 <면앙정가>를 비롯해서 <자상 특사 황국옥당가>, 잡가 두 편, <면앙정단가> 들과 <오륜가>가 그이의 문집에 남아 있다.

 

백일홍 피는 명옥헌

소쇄원과 마찬가지로 명옥헌 원림도 한국의 정원에서 빠지지 않는 자태를 자랑한다. 식영정에서 팔백팔십칠 번 지방 도로를 이용해 담양으로 가다 보면 위로 호남고속도로가 보이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명옥헌 원림으로 가는 간판을 볼 수 있다.

오 희도의 아들 오 이정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헌을 짓고 이를 명옥헌이라 이름지었다. 헌은 경관을 감상하고 심성을 수양하는 방으로 보통 사랑채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오 이정은 스스로 호를 장계라 한 바 장계정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 대경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여 있고 둘레에 적송과 자미나무 들이 심어져 있으며 조경 또한 뛰어나다. 원림은 울타리 안에 조경이 이뤄진 곳을 말하는데, 고서면 산덕리에 있는 명옥헌 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정자를 결합해 전통 정원을 보여 준다. 게다가 그 앞에 있는 연못은 우아한 멋을 자아낸다. 방에는 구들을 놓았는데, 정자 옆으로 자그마한 굴뚝은 아기자기한 맛을 더해 준다.

 

명옥헌 원림으로는 가끔 그림을 그릴 겸 가정부인들이 봄나들이를 오는데, 연못 옆으로 창문을 낸 노란 대문의 집은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눈길을 빼앗는다. 이 마을 토박이로 지금은 광주에 살면서 이 마을의 감나무 농사를 짓는 오씨 성을 가진 어떤 이는 그 집이 "모 시인의 집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시인의 제자인지 후배가 그림을 그리며 집을 지킨다고 한다며 자랑이다.

"기둥이 기울어져 보수를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작년에 명옥헌을 다시 지었어요. 간판과 현판도 오씨 문중에서 다시 걸었지요. 칠월에 백일홍이 파는 시기에 오면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황소개구리는 여전히 극성이다. 명옥헌 원림의 연못이며, 그 앞 양어장의 물고기들이 씨가 마를 정도가 됐다고 한다. 사실 담양에 씨가 마르고 있는 건 물고기만이 아니다. 담양에서 우리나라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죽물도 이제는 과거의 번성기를 뒤로하고 사라지는 물건 취급을 당하고 있다. 명옥헌 원림에서 만난 오씨도 "옛날에는 대나무만 베도 혼이 났는데, 지금을 그걸 다 뽑고 그 자리에 감나무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담양읍을 가로지르는 금성천변에 있던 삿갓점머리라는 죽물시장(이 일, 칠 일에 열리는 오일장)도 이제는 한낱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전에 죽물시장은 이제 주차장이 되었고, 그나마 옳겨간 곳에서도 장은 서지 않는다. 장날이면 몇 사람 잠시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다.

 

수입품에 밀려난 담양 죽제품

지금 죽물은 담양 중앙통이라 불리는 읍사무소 골목 여기저기에 있는 예닐곱 개 점포에서 대부분 거래된다. 여기서 가게를 하고 있는 박 종원 씨는 "왕년에는 나도 돈 좀 벌었다"면서 과거 죽물시장의 번성했던 시기를 회상한다.

"십오 년 전만 해도 죽물시장에서 사람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자리잡기도 무척 힘들었지요. 대나무를 키우는 사람도 돈을 벌었고, 죽물을 만드는 사람도 돈을 벌었지요. 우리 같은 상인도 돈을 많이 벌었어요. 죽제품 만들어 자식 대학 보내는 짭짤한 군으로 소문이 났지요. 그때는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지금 그가 털어놓는 현실은 냉혹하고 썰렁하다. 담양의 거리만큼 말이다.

"지금은 죽물을 만드는 사람이 없어요. 외국에서 만든 물건이 우리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어요.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죽물은 우리나라 죽물 가격의 십 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예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물을 쓰려고도 하지 않아요."

확실히 대나무를 엮어 만들어 썼던 소쿠리며, 광주리, 바구니, 조리 들은 이제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이 그것들을 대신해 부엌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죽물을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장식용 죽물을 많이 만들고, 또 이것들이 많이 거래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들이 전등갓이고, 장식용 패랭이 모자고, 삿갓이나 조리도 쌀을 이는 용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벽에 걸어놓으라고 일부러 크게 만들어 놓은 대형 조리다. 한마디로 실용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채 만들어 벌이도 안 돼요. 하루 이만 원 벌이도 힘들어요."

손수레에 가득 채를 끌고 와 가게 앞에 부려놓고는 저녁 햇살을 받으며 오던 길을 재촉하는 박 인기 씨의 굽은 허리는 펴질 줄을 모른다.

출처 : http://tong.nate.com/justinkim/b946081

Posted by 스노우볼^^

댓글을 달아 주세요